[뉴스락] '필사즉생(必死則生)'. 해마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이 말은 극단적 경쟁 속에서 버티는 학생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정시보다 내신 중심의 수시 비중이 꾸준히 확대되면서, 학생들은 내신 관리와 비교과 준비까지 떠안아야 하는 복잡한 전형 체계 속에서 과도한 학습 부담에 놓여 있다.

이런 가운데 입시 체제의 기반인 공교육 교과서 시장에서 고질적인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1950년대 정부의 제작·배포 역량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검정교과서 제도'는 교육 다양성을 확대한다는 명분 아래 민간 출판사의 참여를 크게 늘려왔다.

그 결과 오늘날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대부분이 민간 검정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문제는 공공재 성격이 강한 교과서 시장에 민간 출판사가 깊숙이 개입하면서, 교육의 공공성과 시장 논리가 충돌하는 구조적 한계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소수 출판사의 독·과점 구조가 심화되면서 실제 교육 현장에도 왜곡과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뉴스락>은 공공재인 교과서 시장에 민간 출판사가 참여하면서 발생한 구조적 한계와 그로 인해 제기되는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심층적으로 짚어본다.

서울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여의도고등학교에서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의 모습. [뉴스락 편집]
서울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여의도고등학교에서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의 모습. [뉴스락 편집]

 

검정교과서, 민간 출판사에 장악… 저작권료로 '시장 봉쇄'

출처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4 출판산업 실태조사' [뉴스락 편집]
출처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4 출판산업 실태조사' [뉴스락 편집]

검정교과서 제도는 '교육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민간에 문을 열어줬지만, 그 결과 교과서 시장은 소수 대형 출판사가 좌지우지하는 폐쇄적 구조로 굳어졌다.

공공재였어야 할 교과서가 사실상 민간 기업의 수익 자원으로 사유화된 셈이다.

현재 중·고교 검정교과서는 대부분 민간 출판사가 집필·발행하고, 저작권은 전적으로 이들 출판사에 귀속된다. 이용료 역시 출판사가 마음대로 정한다.

교육부에 따르면 비상교육·동아출판·미래엔·아이스크림미디어·천재교과서 등 5개 출판사가 검정교과서 시장의 84.7%를 점유하고 있다.

문제는 교과서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공교육의 근간이라는 점이다. 국고가 투입되는 검정심사와 정부 예산이 교과서 제작·유통에 쓰이지만, 정작 저작권과 수익구조는 민간에 집중돼 있다.

공공재가 민간 독점 구조 속에서 '영리 플랫폼'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 같은 구조는 교육 콘텐츠 기업, 특히 중소 에듀테크 업체에 '넘기 힘든 벽'으로 작용한다.

실제 한 중소기업 A사는 무단 사용이 만연한 교재 시장을 개선하고자 출판사로부터 교과서 저작권을 정식 라이선싱해 학원·강사·에듀테크 기업이 합법적으로 콘텐츠를 사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추진했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이 높은 비상교육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저작권료를 제시하면서 A사는 사업 지속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고, 지난 7월 해당 사안을 '부당한 거래거절'로 공정거래조정원에 제소했다.

A사에 따르면 대형 출판사가 제시하는 저작권료는 교과서 1종당 평균 1000만 원에 달한다.

중소업체에겐 사실상 시장 진입을 포기하라는 수준의 비용이다.

비상교육은 <뉴스락>과의 통화에서 "A사와 협의가 완료됐다"고 밝혔다가, 이후 "(자사)법무팀 확인 결과 협의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입장을 번복했다.

결국 협상은 최종 결렬됐고 사안은 공정거래위원회 조정절차로 넘어갔다.

A사 관계자는 "비상교육을 비롯한 대형 출판사들이 요구하는 저작권료를 모두 지불할 경우 회사 수익률이 –48%까지 떨어진다"며 "적자를 피할 수 없어 사업을 유지할 수 없는 구조"라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출판사가 임의로 결정하고 상한선 없는 저작권료 구조가 교육 콘텐츠 시장의 경쟁을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과서 없이 사업을 할 수 없는 교육업계 특성상, 고의적인 고비용 책정이나 사실상의 이용 거부는 공정거래법상 '조건부 거래 거절'에 해당할 소지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승재 법무법인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공공성을 지닌 검정교과서는 필요한 자에게 적정한 조건으로 이용이 허용돼야 한다"며 "검정교과서 없이는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운 영세 교육업체가 많은 만큼, 부당한 조건을 제시하며 사실상 거래를 거절하는 구조는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한 저작권료에 막힌 영세 교육기업… "상생 가능한 구조 마련해야"

출처 :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년 출판시장 통계보고서' [뉴스락 편집]
출처 : 대한출판문화협회 '2024년 출판시장 통계보고서' [뉴스락 편집]

대형 출판사가 쥐고 있는 검정교과서 저작권 이용료는 교육 콘텐츠 기업들, 특히 중소 업체에게 사실상의 '시장 진입 금지선'으로 작용하고 있다.

메가스터디 등 일부 대형 교육기업은 수십억 원 규모의 저작권료를 감당할 수 있지만, 중소 에듀테크 기업과 개인 교습소는 같은 구조를 따라갈 수 없다.

특히 일부 업체는 공식적인 이용 허가를 포기하고 교과서를 비공식적으로 활용하거나 내용을 변형해 사용하는 등 높은 저작권료가 불법 교재 유통이 확산되는 원인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민간 출판사 사정도 녹록지 않다.

검정교과서를 제작하는 대표 출판사인 비상교육은 올해 2분기 매출 440억 원을 기록했으나 전년 동기 대비 5.6% 감소했고, 영업손실은 95억 원으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사의 핵심 수익원은 여전히 교과서 사업이다.

초·중·고등 서책형 교과서, AI 디지털교과서, 교수학습 지원 플랫폼 비바샘, 그리고 학습 교재 한끝, 오투, 완자, 개념플러스유형 등 교과서 기반 사업에서 발생한 매출은 올해 상반기 기준 885억 원으로 전체 매출의 65.1%를 차지했다.

지난해 비상교육이 교과서 연구개발(R&D)에 투입한 금액은 무려 544억 원에 달한다.

출판사 입장에서도 교과서 사업이 회사의 존립과 직결되기 때문에, 저작권을 강하게 보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다만 동시에 교육 생태계 전체가 압박을 받는 상황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저작권료가 합리적인 수준으로만 책정된다면 상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교과서는 공교육의 핵심 기반이자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 만큼, 검정교과서를 중심으로 교육 콘텐츠 시장이 넓어질수록 출판사·중소업체·교습소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교육 시장 전체도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중소 에듀테크 관계자는 <뉴스락>과의 통화에서 "검정교과서의 높은 저작권료 때문에 많은 중소 교육업체가 쉽게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거나 장기적으로 사업을 유지하지 못한다"며 "저작권을 무단 이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수준의 저작권료가 시장가격으로 형성된다면 출판사도, 교습소와 중소업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교과서 저작권료 논란에도 '손 놓은 정부'… 관리·감독 사각지대 심각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전경. 사진=김상우 기자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전경. 사진=김상우 기자

최근 공교육에서도 태블릿 활용이 보편화되고, 교육 현장 전반에서 AI 기반 교육 혁신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학생들의 학습에 필수적인 검정교과서의 저작권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은 교육산업 스타트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가 산업 전반에서 AI 활용 확대를 강조하며 교육 분야 혁신을 주문하고 있지만, 민간 출판사가 교육 교재시장을 사실상 독점한 현 구조에서는 신생 기업들이 교과서 기반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근본적인 제약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검정교과서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이 해당 교과서를 발행한 민간 출판사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구조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리·감독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특히 공정거래위원회는 대형 출판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교과서 구조와, 검정교과서 저작권료의 적적성 여부에 대해 충분한 정보조차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뉴스락>과의 통화에서 "해당 부처에서는 교과서 저작권 관련 사안을 잘 알지 못한다"며 "검정교과서 저작권료가 통상적으로 얼마인지, 적정 시장가격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등에 대한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 시장 독점 여부나 공정거래법 적용 가능성은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뉴스락 미니인터뷰] 전화성 한국액셀러레이터 협회장

검정교과서 저작권에 접근할 수 없는 현재 구조에 교육 스타트업 성장 원천 봉쇄

전화성 한국액셀러레이터 협회장.
전화성 한국액셀러레이터 협회장.

전화성 한국액셀러레이터 협회장은 검정교과서 저작권이 민간 출판사에 집중된 현재 구조가 교육 분야 신생 스타트업의 성장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합리적인 저작권료 기준조차 마련되지 않아, 일부 기업은 높은 이용료를 감당하지 못해 사업을 중단하거나 시장 진입을 포기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AI 기반 산업 혁신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교육 분야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성장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스타트업과 중소 에듀테크 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산업 환경이 구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민간 출판사가 제시하는 과도한 저작권료가 벤처기업에게는 사실상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규제나 제도 개선 없이 현 구조가 유지된다면, 교육 산업에서 중소기업이 지속적으로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내놨다.

그는 특히 정부가 검정교과서를 민간 출판사에 위탁한 이후, 이들 기업이 국고 지원과 유통 권한을 기반으로 교과서를 수익 구조화해온 만큼, 해당 분야에 새롭게 진입하는 스타트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화성 협회장은 "검정교과서는 공교육의 핵심이자 국고가 투입되는 '국민의 콘텐츠'인 만큼, 합리적인 로열티 기준을 마련해 누구나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며 "저작권료가 적정한 시장가격으로 형성되고 중소 교육업체들이 정당한 비용으로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다면, 출판사 역시 장기적으로는 더 큰 시장과 경쟁 구도를 통해 매출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특히 "검정교과서 저작권료의 합리적 책정과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없다면, 교육 시장은 대형 출판사 중심으로 더욱 고착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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