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한때 ‘정권과의 유대’가 기업 성장의 보증수표로 통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대기업 총수 일가의 혼맥은 더 이상 권력과의 결합이 아닌, 실리 중심의 동맹과 개인의 선택으로 재편되는 중이다.
사업적 이해관계를 넘어, 기술과 혁신을 연결하는 ‘미래 동맹’으로 변화한 재계의 혼맥은 새로운 네트워크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젊은 오너세대를 중심으로 사랑과 자유를 중시하는 결혼관이 확산되며 ‘개인의 행복’이 가문의 전략을 대체하고 있다.
<뉴스락>은 재계 혼맥 지도의 변화를 통해 국내 주요 기업들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본다.

'정략결혼'은 옛말...'실리 동맹'과 '자유 연애'가 대세
![대기업집단 총수일가 세대별 혼맥 유형 변화. CEO스코어 제공 [뉴스락]](https://cdn.newslock.co.kr/news/photo/202511/119745_108520_4146.png)
재벌가의 결혼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 '정략결혼'이라는 말이 익숙했던 시절, 사업 확장이나 권력과의 유대를 위해 정·관계 유력 집안과 사돈을 맺는 것은 하나의 공식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이런 모습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총수가 있는 81개 대기업집단 오너 일가 380명을 분석한 결과, 정·관계 집안과의 결혼 비중이 200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줄었다.
2000년 이전 24.2%에 달했던 이 비중이 2000년 이후 7.4%까지 떨어졌다. 특히 젊은 4~5세 경영인들로 내려오면 그 비율은 6.9%에 불과하다. 한때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최태원 SK 회장 등으로 대표되던 권력과의 결합이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정·관계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기업 간의 만남'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재계 집안끼리의 결혼이 새로운 대세로 떠올랐다.
재계 집안 간 혼맥은 2000년 이전 39.2%에서 이후 48.0%로 오히려 늘어났다. 특히 오너 3~5세대에선 두 쌍 중 한 쌍(각 47.9%, 46.5%)이 다른 기업의 자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LS그룹은 7곳의 다른 대기업과, LG와 GS는 각각 4곳과 사돈을 맺으며 끈끈한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정치권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기업 간 결합만으로 충분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실리적 판단이 깔린 셈이다.
동시에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도 뚜렷하다.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유연애 결혼'이다.
이선호 CJ제일제당 경영리더가 방송인과 결혼하고, 정준 현대카드 이사가 세계적인 골프 선수 리디아 고와 화촉을 밝힌 것처럼 말이다.
오너 4~5세대의 경우 약 37.2%가 연예인, 스포츠 스타를 포함한 일반인과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문의 사업보다 개인의 행복과 사랑을 우선하는 문화가 재계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모습이다.
국정농단 이후 달라진 재계..."권력 사돈? 이젠 리스크"

혼맥 트렌드의 변화는 정경유착이 더 이상 생존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재계의 현실 인식을 반영한다.
정부 주도 성장기였던 1960~90년대, 인허가와 규제 완화를 위한 정치권 네트워크는 기업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정·관계와의 유대로 사업의 길을 트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글로벌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무게중심은 기술과 자본, 혁신으로 빠르게 옮겨갔다.
'권력'의 입김보다 '시장'의 선택이, '청탁'보다 '압도적 기술력'이 기업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 전환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국정농단 사태였다.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현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재계 최상위 그룹 총수들이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줄줄이 구속되거나 장기간 재판을 받으며 '권력 리스크'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여기에 공정거래법 강화와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 시행은 회색지대의 여지를 좁혔고, 불투명한 접촉은 곧 '리스크 관리 실패'로 간주되는 제도적 환경이 조성됐다.
정치적 영향력의 효용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자, 재계는 과거의 관행과 선을 긋는 구체적인 행동에 나섰다.
국정농단 사태의 중심에 섰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삼성·현대차·SK·LG 등 주요 그룹이 잇따라 탈퇴하며 '거리두기 경영'으로 선회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제 기업들은 불확실한 정치적 연줄에 기대기보다, 각 계열사가 자율적 판단과 기술 경쟁력으로 시장에서 생존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술 동맹'과 '소프트 파워'...미래를 위한 새로운 혼맥 공식
![(왼쪽부터) LS ELECTRIC 황원일 사업부장, 두산퓨얼셀 이승준 본부장, 한화파워시스템 손영창 사업담당, 한화자산운용 허경일 본부장이 참석한 MOU 체결식 현장. LS일렉트릭 제공 [뉴스락]](https://cdn.newslock.co.kr/news/photo/202511/119745_108598_4319.png)
재계가 '권력 리스크'와 거리를 두는 대신, 미래 기술 선점을 위한 기업 간 네트워크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과거 정·관계 유착이 사업 확장의 지름길이었다면, 이제는 기업 간 전략적 동맹이 생존의 새로운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관계 혼맥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기업 간 혼맥'이다. LS그룹과 두산그룹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구자열 전 LS그룹 회장의 장남인 구동휘 LS MnM 부사장과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의 장녀 박상민 씨가 2017년 혼인하면서, 두 그룹은 단순한 사돈을 넘어 사업 파트너로 발전할 기반을 마련했다.
송배전 등 전력 인프라에 강점을 지닌 LS와 원자력·가스터빈 등 발전 설비 기술을 보유한 두산의 만남은 그 자체로 강력한 시너지를 예고한다.
혼맥을 넘어 '경쟁자 간 협력'도 활발하다. 수십 년간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 온 삼성과 LG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LG디스플레이의 OLED 패널을 TV에 탑재하고,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은 동일한 완성차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며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는다. 국경 없는 기술 전쟁 속에서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는 미래 산업 주도권을 잡기 위한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가 있다.
삼성은 향후 5년간 반도체, 바이오, 신성장 IT 등 분야에 450조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으며, 현대차그룹 역시 2030년까지 국내에 125조 2,000억 원을 투입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개별 기업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반을 강화하려는 전략도 구체화되고 있다. SK그룹이 정부와 함께 8600억 원을 투입해 차세대 반도체 테스트베드 '트리니티 팹'을 조성하는 것이 좋은 예다.
특정 기업이 기술을 독점하는 대신, 개방형 협력을 통해 국내 반도체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기업 간 동맹이 우리 산업의 '안전판'이자 성장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과거의 혼맥이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면, 지금의 결합은 산업 경계를 넘어 생존을 모색하는 '개방적 자본주의'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