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락]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수십, 수백 명의 노동자가 운명을 달리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함께 진상규명을 외쳤던 동료마저 세상을 등졌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동료들을 생각하면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수십 기가바이트(Gigabyte)의 자료를 모아 법무부에 진정서를 넣고 기약없는 답변을 기다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응용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 위원장의 이야기다.

박응용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 위원장. 사진 뉴스락 DB.
박응용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 위원장. 사진 최진호 기자.

박 위원장은 2007년 15명의 노동자가 단기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뒤부터 그는 10년이 넘도록 한국타이어 노동자 산업재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12월의 어느 평일 오후, 충북테크노파크 인근에서 직접 만난 그는 연신 “거동이 불편한 나를 찾아와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했다. 산재 진상규명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그 역시 대동맥 및 동맥혈관에 만성 염증이 생기는 ‘다카야수 동맥염’이라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다.

언제든 돌발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많은 움직임을 할 수 없는데다가 치료에 전념해야 하는 상태지만, 그는 지난달 26일 자료를 모으고 모아 법무부 인권국에 산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또 한 번 제출했다. 답변을 얻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틈틈이 서울을 오가고 있다. 

그의 진정서에 담긴 피진정인은 조양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그룹 회장,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 이명박 전 대통령, 10년 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임직원 등 10명이다.

산업재해 진상규명에 기업 회장과 사장 그리고 당시 대통령까지,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주장하는 피진정인 선정 사유는 약 10년 전 노동자 집단사망 사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응용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 위원장. 사진 뉴스락 DB.
박응용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 위원장. 사진 최진호 기자

“2007년 15명 집단사망, 역학조사 진상규명 외쳤지만 외면당했다”

1994년부터 1995년 말까지 한국타이어 공장에서 타이어 성형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현장 근무를 해봤기 때문에 현장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인지 잘 안다”면서 “타이어를 찌는 과정에서 고무 흄 등 유해물질이 매우 심각하게 발생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 통계 및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로부터 제공받은 자료에 따르면, 1996년에서 2007년 사이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금산공장, 연구소 등지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노동자 수는 93명에 달한다. 근무부서도 제품검사팀, 품질관리팀, 정련·성형부서 등 다양했으며, 사망원인 또한 암, 출혈, 질식, 심장·폐손상 등 다양했다.

사망원인 중엔 유독 ‘상세불명’의 질병이 많았다. 박 위원장은 이러한 조사 결과가 결국 집단사망을 불러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6~2007년 사이, 한 해에만 15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에 그동안의 사망사고에 대한 원인규명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2008년 2월 발표된 역학조사 결과 2006년 기준 한국타이어 노동자의 심장질환 사망률이 전국 사망통계 대비 5.6배 높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심혈관계질환 사망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유해물질이 아닌, 교대작업으로 인한 과로나 작업장 내 고열 등 작업환경 자체가 문제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 위원장은 “이렇게 결론이 날 경우 유해물질로 인해 유발될 수 있는 심장질환, 정신계통 질병 등 수많은 노동자들 각각의 질병 원인이 작업환경 문제 하나로 통합되는, 근본적 원인이 잡히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2007년 한국타이어 노동자 사망자(93명) 명단 및 사망원인 일부, 상세불명의 질병이 많은 것은 산재 역학조사가 그동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박응용 위원장은 주장하고 있다. 사진 박응용 위원장 제공.
1996년~2007년 한국타이어 노동자 사망자(93명) 명단 및 사망원인 일부, 상세불명의 질병이 많은 것은 산재 역학조사가 그동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박응용 위원장은 주장하고 있다. 사진 박응용 위원장 제공.

박 위원장은 “한국타이어 사용 유해화학물질 200여종에 대한 작업환경측정 등을 배제한 점, 각 노동자 질병 발생과 사망원인을 사망시기에 맞춰 조사하지 않고 2004년·2007년 작업환경 측정 자료를 통해 기준치 이하 수치를 반영해 진행한 점 등을 지적했다”면서 “당시 일부 자문위원들도 조사가 미흡하다는 지적을 했고, 추가 조사를 거쳐 2009년 4월 최종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 또한 벤젠, 톨루엔 등 주요 발암물질이 배제된 채, 정확히는 원인이 되는 주요 유해물질이 대부분 영업비밀(식별기호 S1)을 이유로 미공개 된 채 결과가 발표됐다”고 말했다.

역학조사와 동시에 진행된 고용노동부 특별근로감독에서 한국타이어는 1394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법사항이 적발됐다. 2008년 조사에선 180건의 산재 은폐 혐의도 드러났다.

이후 한국타이어는 약 500억원을 들여 환기통을 교체하고, 무벤젠 솔벤트를 사용하는 등 개선을 마쳤다고 밝혔다. 산재율도 0.98%로 낮아졌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위원장은 “만약 완전히 개선이 됐다면 매년 증가하는 사망 노동자 수와 질환자 수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반박한다.

2008년부터 2016년 1월까지 한국타이어 전국 공장, 연구소 등 총 노동자 중 사망자 수는 46명으로, 매년 사망자는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질환자 수도 점점 늘고 있다. 한국타이어 특수건강검진 결과 질병유소견자와 요관찰자는 총 노동자 수 5710명 중 2011년 776명(13.6%), 2012년 653명(11.4%), 2013년 633명(11.1%)를 기록했지만, 2014년부터 총 노동자수 5750명 중 1996명(34.7%), 2015년 2396명(41.7%), 2016년 2492명(43.3%), 2017년 44.8%까지 상승했다.

0.98%라는 낮은 산재율에 대해서도 박 위원장은 정경유착, 사측의 압박 등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한국타이어는 당시 유력 대선후보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돈기업(이 전 대통령 딸 이수연씨와 조현범 사장 2001년 혼인)으로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는데, 2006년부터 한국타이어 노동자 사망사고가 이슈가 되자 이 전 대통령이 노사정위원회를 앞세워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을 개정해 질환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물질을 지정해놓고 이 밖의 다른 사례는 인정하지 않거나 폐쇄적으로 조치하는 등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을 매우 축소시켰다”면서 “이로 인해 유해물질로 사망했다고 의심됐던 노동자들이 전부 고열, 과로 등 작업환경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다”고 주장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일부, 박응용 위원장은 이 개정안으로 인해 산재 신청 범위가 매우 축소됐다고 주장한다. 사진 국가법령정보센터 캡쳐.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 일부, 박응용 위원장은 이 개정안으로 인해 산재 신청 범위가 매우 축소됐다고 주장한다. 사진 국가법령정보센터 캡쳐.

이어 박 위원장은 “이후 이 전 대통령은 취임 후 바뀐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을 대통령령으로 공표했다”면서 “뿐만 아니라 당시 친이계이자 환경노동위원장이었던 홍준표 의원(전 자유한국당 대표) 주도 하에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설치, 산재 소통 창구를 단일화해 산재를 신청하려는 시도 자체가 줄었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2008년 피해자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검찰 고발을 진행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업비밀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었던 유해물질과 관련해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한국타이어로부터 피소를 당해 1심 패소하기도 했다.

그 사이 그에게 다카야수 동맥염이 찾아왔고 한 차례 쓰러졌던 그는 휴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박응용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 위원장이 산적한 한국타이어 관련 자료를 옆에 두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박응용 위원장 제공.
박응용 한국타이어 산재협의회 위원장이 산적한 한국타이어 관련 자료를 옆에 두고 진실 규명을 위한 힘든 여정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사진 뉴스락DB

“개선했다더니 사망자 또 잇따라, 동료들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나야 했다”

박 위원장이 다시 몸을 일으키게 된 계기는 2015년 박찬복 노동자 사망사건이다.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LTR(화물차용 타이어 생산라인) 가류공정 작업을 14년 동안 맡아온 고(故) 박찬복씨는 2015년 10월 혈액암 진단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다 합병증으로 그 해 12월 숨졌다.

박 위원장은 “앞서 2003년에도 혈액암으로 노동자 유병택씨가 숨지는 등 벤젠, 톨루엔 등 유해물질이 인체에 주는 영향은 막대하다”면서 “그런데 문제가 다 해결됐다던 한국타이어 공장에서 근무하던 노동자가 혈액암으로 또 숨졌는데, 회사는 사망진단으로 쯔쯔가무시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는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다시 긴 싸움을 이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한국타이어 전·현직 노동자 김운학(간경화 다발성 신경병증), 정봉진(알츠하이머), 고(故) 이진재(고악성 활막 육종암(근육암))씨와 함께 2016년 산재신청과 함께 역학조사를 신청했다.

그런데 6개월이면 나올 역학조사 결과가 약 4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 왜 미뤄지는지도 설명도 없고, 전화를 해서 문의해도 진행상황을 말해주지 않는다며 박 위원장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지난 6월 근육암으로 사망한 고(故) 이진재씨 생전 모습. 사진 KBS 추적60분 방송화면 캡쳐
지난 6월 근육암으로 사망한 고(故) 이진재씨 생전 모습. 사진 KBS 추적60분 방송화면 캡쳐

그 사이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에서 지난 6월 이진재씨가 4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나머지 김운학, 정봉진씨도 중증질환자로 병상에 누워있는 상태다.

박 위원장은 “2010년 입사해 2014년 근육암 진단을 받고 2016년 퇴사한 이진재씨는 타이어 외관을 검사하고 내부에 직인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벤젠, 톨루엔 등이 함유된 복합유기용제를 집중적으로 취급해 위험에 노출됐다”면서 “2016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냈으나 거절됐고, 이번에 역학조사마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떠났다”고 말했다.

이어 박 위원장은 “이진재씨 외에도 수많은 전·현직 노동자들이 작업장 내 유해물질 원인이 의심되는 질환들을 현재도 많이 앓고 있다, 심적·육체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이들도 많다”면서 “특히 유해물질은 뇌심혈관계질환이나 정신질환계통으로도 영향을 주지만, 이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어려워 산재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안타깝지만 유의미한 결과도 있었다. 15년 이상 한국타이어 생산관리팀에서 근무해오다 지난 2009년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 끝에 2015년 숨진 안일권씨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유족 측이 일부승소한 것.

1심 재판부가 “사측이 타이어 제조업과 발암물질 노출 연관성을 인지하고도 안전배려의무를 충분히 다하지 않았다”면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2심 재판부 역시 지난해 10월 원심 판결을 인정, 손해배상액을 증액했다.

한국타이어 측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박 위원장은 이 판결이 많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한국타이어 측은 유해물질 피폭 기준치가 이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어필을 해왔는데, 재판부가 ‘피폭 기준치 이하 수치를 기록했더라도 누적지수를 적용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린 부분”이라며 “유해물질에 대한 인체 피해가 수년, 수십 년의 잠복기를 거쳐 발생하는 만큼 유의미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이후 문제의식을 갖게 된 대한변호사협회가 해당 시행령과 관련해 지난 10월 21일 심포지엄을 갖고, 법 개정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변호사협회 상담기구도 신설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변협 상담기구를 만들고도 아직까지 상담사례가 없다는 점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며 “이는 산재 신청에 대한 회사의 보복 또는 장기간의 소송이 두려워 산재 신청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사망한 이진재씨 역시 산재 신청을 하려다 회사 관리자의 압박에 못 이겨 회사를 나와 투병생활부터 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전에 언급한 바 있다.

박 위원장은 지정병원의 진료 방식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현재 한국타이어 산재 신청자들이 진료를 받는 지정병원은 대전 선병원인데, 노동자들이 이곳에서 검사를 받았을 때 결과가 축소된다는 것이다.

박 위원장은 “얼마 전 사망한 이진재씨도 이 병원에서 근육에 단순히 혹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었는데, 수도권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근육암이라는 진단을 나중에 받게 된 것”이라며 “검사 결과를 축소한 것이 아니라면 이 역시 명백한 오진에 해당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7년 초 문재인 캠프에서 박응용 위원장에게 한국타이어 산재 관련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이메일 답장을 보내왔다(왼쪽), 박 위원장이 지난달 26일 법무부 인권국에 제출한 진정서 일부(오른쪽). 사진 박응용 위원장 제공.
2017년 초 문재인 캠프에서 박응용 위원장에게 한국타이어 산재 관련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이메일 답장을 보내왔다(왼쪽), 박 위원장이 지난달 26일 법무부 인권국에 제출한 진정서 일부(오른쪽). 사진 박응용 위원장 제공.

“해결 약속했던 문재인캠프, 약속 안 지켜 매우 지친 상태…고무산업 개선 나서야”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문제들이 2017년 이후 해결 국면을 맞을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는 “2017년 초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캠프에 질의서를 보낸 결과, ‘한국타이어 노동자 집단사망 사태를 포함한 고무산업 종사자들의 업무상 질병 원인 규명 및 치료방안 등 종합적인 방안마련 필요성에 공감하고, 유해물질 관리 기준과 산재 처리 관련 법 개정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면서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고, 정권이 바뀐 만큼 큰 기대를 걸었지만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다, 기대를 걸었던 만큼 이 부분이 가장 심적으로 지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달라지는 것이 없었기에 박 위원장은 10여년 간의 자료들을 종합해 최근 또다시 법무부에 진정서를 제출함으로써 소리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박 위원장은 “세계 암 협회는 고무산업을 고위험산업으로 분류하고 있고, 미국이나 일본에선 이미 1960~1970년대부터 원인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연구 및 제도 마련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면서 “국내 굴지의 타이어 기업인 한국타이어가 노동자들의 산재에 대해 수십 년 동안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위원장은 “나라가 성장·발전하면서 기업 규모가 확대되고 명성을 얻은 만큼, 노동자들을 이제는 파트너로 생각하고 함께 가야 하는 것이 기업의 올바른 자세”라면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이 하루빨리 원상복구 돼 병든 노동자들이 좀 더 폭넓게 산재 승인을 받고, 산재 관련 독립행정기구가 출범돼 어떠한 유착 의혹도 없이 원활하고 공정한 산재 판정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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